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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진달래꽃의 향기- ‘면천 두견주’
전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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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옴세. 






백년덧 시름 잊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김육(金堉, 1580~1658)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꽃 피는 시기에 음주를 즐겼더랬다. 당시에는 꽃으로 빚은 술이면 100년 시름도 잊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했다. <전통주 다이제스트> 첫 화의 주인공,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86-2호에 빛나는 면천 두견주다.








고려 개국 공신인 복지겸은 면천(現 충남 당진시)에 낙향해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름 모를 병을 얻게 됐다. 용하다고 하는 명의들이 그의 병을 살피고 온갖 좋다는 약을 썼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백약이 무효였다.

이에 그의 딸 영랑이 밤낮으로 기도를 올린 지 100일째 되는 날, 꿈에서 아미산(당진 소재) 진달래꽃과 우물물로 술을 빚어 100일 후 먹이고 앞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으라는 계시를 받는다. 영랑이 이대로 행하자 복지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오래 전부터 구전돼 오는 두견주에 얽힌 설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서 사실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 참을 수 없이 밀려든다면 당장 뒤로가기를 눌러라. 사실 관계를 모두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또 그렇다고 한들 무엇이 상관인가.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굳이 ‘팩트 체크’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두견주 담그는 장인의 모습.(사진: 문화재청)



또 다시 버릇처럼 서두가 길었다. 아무튼 우리는 두견주가 여느 전통주처럼 고유한 설화를 갖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두견주는 충남 당진시 면천면이 고향이다. 밑술을 빚고 발효와 숙성을 거쳐 침전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100일 가량이 소요된다. 알콜 도수는 높다고도 낮다고도 할 수 없는 18도다. 최근까지 인간문화재인 고 박승규 씨가 계승·보전해 왔으며 지난 2002년부터 면천면 8개 가구가 보존회를 결성해 만들어오고 있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당진 솔뫼성지에서 열린 사제단 만찬에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후 천주교 아시아 청년대회와 일본 대사관 행사 등의 공식 만찬주로 쓰였다.



두견주는 진달래꽃으로 만든 술이다. 진달래는 한자어로 두견화(杜鵑花)라고 부른다. (사진: 면천두견주 보존회)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들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번 시리즈의 핵심인 본격 시음기를 공개한다. 전통주를 ‘다이제스트’할 첫 오프라인 모임에는 총 3명이 참여했다.

WHEN: 꽃향기 날리는 3월 어느 날

WHERE: 서울 을지로 일대

DISHES: 호박전, 데친 오징어

MEMBERS: 신사동 라이어(36·연극인), 정발산 츄리닝(32·무직), 본 에디터(不편집장)







노란색에 검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색감. 아주 조금 짙은 명도의, 그러나 빛이 살짝 감도는 액체가 불투명한 유리병에 담겨 신비함을 더한다. 탁한 질감의 병에서 흘러나온 술은 맑은 빛깔을 발한다. 두견주의 첫인상이다.



라이어: 딱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색감이네. 왠지 술맛도 그럴 것 같은데. 빨리 들이켜보자.

不편집장: 아직 안됨. 시각과 후각으로 먼저.

츄리닝: 미학적 관점에선 별로. 색깔만 봐선 첫눈에 땡기지는 않아. 근데 궁금하다. 옷차림은 그닥인데 자꾸 쳐다보게 되는 여자 같다고나 할까.

라이어: 일단 술병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광택이 없는 ‘매트’한 유리병에서 이렇게 투명한 술이 나오다니. 색다른 반전인데.







여느 집에서 제사를 지내듯 엄숙하게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른다. 약속하지 않아도 저절로 조심스런 손길이 오간다. 우리가 지금 주고받는 술은 전통주니까. 짐짓 술잔을 응시하는 잠깐의 시간을 거친 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음미해 본다.

츄리닝: 아, 달다. 마셔본 술 중에서 가장 단맛이 강한 것 같아.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질색할 수도 있겠네.

라이어: 달기는 한데 기분 나쁜 싸구려 단맛은 전혀 아님. 약간 고급스럽달까.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나 전통주요’하는 고집스런 느낌은 없네.

츄리닝: 진달래가 원래 이렇게 향이 강한 꽃이었나? 고작 한잔 마셨는데도 비강에서 향기가 가시질 않네.

不편집장: 찹쌀이 들어갔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술이 밀도가 있어. 단맛 못지않게 쌉싸름한 뒷맛이 입을 정갈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 좋네.

라이어: 잡스런 맛이 없다는 게 최고 미덕 같아. 싱글몰트 위스키가 좀 그렇잖아. 깔끔하고, 매끈한 그런. 옷으로 치면 트렌디함 대신 클래식한 수트가 주는 멋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박스에 넣어서 판매한다. 선물하기도 좋다. (사진: 不편집장)



몇 순배가 도는 동안 안주가 나왔다. 호박전과 데친 오징어. 굳이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전통주라는 점을 은연중에 의식한 것 같다.

不편집장: 안주는 어때? 좀 어울리나?

라이어: 호박전도 원래 은은한 단맛이 강점인데 술의 향이 워낙 강하다보니 존재감이 사라진 듯. 짭짤한 맛이 더 느껴져.

츄리닝: 난 조금 더 짠맛이 강한 오징어가 잘 맞는 느낌. 요새는 아무래도 ‘단짠’이 최고 아니겠어?

不편집장: 어울릴만한 다른 안주는 뭐가 있을까?

츄리닝: 상큼한 맛을 가진 심플한 안주가 어울릴 듯. 베리류 과일이나 발사믹 들어간 샐러드?

라이어: 난 오히려 심심하고 슴슴한 게 맞을 것 같아. 갑자기 시골에 계신 할머니 만두가 떠오르네. 되게 담백했거든.



줄어들고 있는 술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는 연극인 라이어 씨. (사진: 不편집장)



두견주 한 병(700ml)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이 되니 다들 취기가 오르며 나른해진다. 자연스레 말도 많아진다.

츄리닝: 근데 이거 한 병에 가격이 얼마야?

不편집장: 2~3만원쯤?

츄리닝: 작업주로 사용하기엔 약간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네.

라이어: 어린 친구들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 근데 꼭 가격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이성을 유혹할 목적으로는 그다지... 요즘 단맛 싫어하는 여자들도 많아.

不편집장: 조상님을 유혹하는 술로는 어떨까? 제사상에 올린다면.

라이어: 괜찮을 것 같아. 꼭 전통주라서가 아니라 품격과 무게감이 있는 술이니까. 다같이 음복하기도 좋겠네.

이야기는 자연스레 전통주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츄리닝: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술인데 서른이 넘도록 존재 자체도 몰랐다니. 그동안 너무 소주만 마셨어.

라이어: 맞아. 그렇지만 알 방도가 없기도 했지.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접하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이렇게 색다른 술을 마셔주는 게 건강한 음주인데.

不편집장: 요즘엔 전통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 꺼내는 순간 곧바로 꼰대나 아재 취급받음.

라이어: 그러니까. 아니 무슨 상투 틀고 다니자는 것도 아닌데, 너무들 해.

츄리닝: 진부한 주장이긴 하지만, 전통주 입장에서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봐. 계승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마시는 사람이 없고 아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기사도 그렇잖아?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널리 읽혀야 생명력이 생기고 세상이 바뀌지.

不편집장: 그런 맥락에서 <전통주 다이제스트>도 많이 읽혀야 할 텐데. 아무튼 우리라도 계속 열심히 마시도록 하자고. 마시는 사람이 있으면 계속 만들겠지.



츄리닝 씨. 두견주에 푹 빠진 그는 이날 화장실을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사진: 不편집장)



추켜세우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면서 한 병을 모두 비웠다. 두견주와의 짧은 만남에 아쉬움이 찾아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거자필반이고 회자정리라 하지 않나.

라이어: 이제야 정이 조금 들었는데 생이별이라니. 어디서 더 구해올 순 없나?

츄리닝: 박수칠 때 떠나는 게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 난 오히려 다음 주가 더 기대돼.

不편집장: 기대 노노. 당분간 패널은 계속 로테이션할 계획임.

츄리닝: 아니, 같은 사람이 여러 전통주를 마셔보면서 비교를 해야하는 거 아닌가?

不편집장: 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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