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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눈의 이방인이 디자인했다, 맛깔난 전통주의 ‘병 맛’
    전통주 전문가 이지민씨와 ‘아몬드 스튜디오’ 팀의 한국인 디자이너 조수아씨, 핀란드 출신 디자이너 밀라, 노르웨이 출신 디자이너 앨런드(왼쪽부터). 테이블 위 세 병의 추성주 중 가장 왼쪽이 위스키 병을 연상시키는 새 제품이고, 나머지 두 개는 기존에 쓰였던 전통적인 디자인의 도자기 병이다. [강정현 기자]

    전통주 전문가 이지민씨와 ‘아몬드 스튜디오’ 팀의 한국인 디자이너 조수아씨, 핀란드 출신 디자이너 밀라, 노르웨이 출신 디자이너 앨런드(왼쪽부터). 테이블위 세 병의 추성주 중 가장 왼쪽이 위스키 병을 연상시키는 새 제품이고, 나머지 두 개는 기존에 쓰였던 전통적인 디자인의 도자기 병이다. [강정현 기자]

    불쑥 솟은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는 멀리 갈수록 농담이 옅어진다. 그 담담한 풍경 속을 선비가 걷고 있다.
     

    유학 온 북유럽 출신 디자이너 2명
    전통주 15종 마시며 매력에 빠져
    담양 ‘추성주’ 레이블 새롭게 바꿔
    “선비와 자연을 콘셉트로 잡았죠”

    새로운 추성주 레이블 디자인. 병에 두른 것을 길게 폈다. [사진 아몬드 디자인]

    새로운 추성주 레이블 디자인. 병에 두른 것을 길게 폈다. [사진 아몬드 디자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이 그림은 대한민국식품명인 22호 양대수 명인이 4대째 빚고 있는 ‘추성주’의 새로운 레이블(상표)이다. 전남 담양의 옛 지명인 추성(秋成)에서 이름을 따온 터라 그동안 추성주는 특산물인 대나무 모양의 도자기 술병에 주로 담겼다. 전통주다운 묵직한 멋은 있지만 젊은 세대에겐 ‘할아버지의 술’로 보인다. 이번에 그것을 앱솔루트 보드카처럼 투명한 병에 담고, 레이블도 모던하게 바꿨다.
     
    이 새로운 레이블을 디자인한 이들은 핀란드 출신 밀라(Milla Niskakoski·29)와 노르웨이 출신 앨런드(Erlend Storsul Opdahl·26)다. 본국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한 두 사람은 아시아문화권 경험을 위해 2011년과 2013년에 각각 홍익대 국제디자인 전문대학원으로 유학 왔다. 졸업 후 1년 간 한국 기업에서 함께 근무했고, 올해 2월 또 다른 대학원 동창 조수아(31)씨와 디자인 사무실 ‘아몬드 스튜디오’를 냈다. 추성주는 이 팀이 맡은 두 번째 작업이다.
     
    추성주 기존의 도자기 병(왼쪽), 모던한 레이블과 투명한 병으로 새단장한 추성주. [사진 아몬드 디자인]

    추성주 기존의 도자기 병(왼쪽), 모던한 레이블과 투명한 병으로 새단장한 추성주. [사진 아몬드 디자인]

    “이 술을 즐겨 마셨다는 ‘선비’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어요. 자연을 사랑해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며 술 마시는 걸 좋아했다죠. 그래서 디자인 콘셉트를 ‘산(자연)과 선비’로 잡았죠.”(밀라)
     
    한국문화에 아직 낯선 이들에게 전통주와 선비, 추성주의 특징을 설명해준 사람은 홍보·마케팅 업체 PR5번가의 이지민(38) 대표다. 2014년부터 전통주를 소개하는 웹 콘텐트 ‘대동여주도(酒)’ ‘니술냉가이드(언니들의 술 냉장고)’를 제작·운영하고 있는 전통주 전문가다.
     
    “오래된 양조장들은 영세해서 병 디자인에 돈 쓸 여유가 없어요. 별 수 없이 플라스틱 공병에 조잡한 레이블을 붙여 쓰다보니 ‘전통주=싸구려 술’이라는 편견이 생길 수밖에요. 도자기 병은 무거워서 서빙하기 힘들고 테이블을 긁어서 상처만 만든다고 식당·바들이 꺼리죠.”(이지민)
     
    벚꽃을 이미지로 아몬드 스튜디오팀이 디자인한 국산 수제 맥주캔. [사진 아몬드 스튜디오]

    벚꽃을 이미지로 아몬드 스튜디오팀이 디자인한국산 수제 맥주캔. [사진 아몬드 스튜디오]

    전통주에도 젊고 감각적인 비주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 대표는 추성고을 대표(양대수 명인의 아들)를 설득하고, 지인의 소개로 아몬드 스튜디오 팀을 만났다. 첫 미팅 때부터 술판이 벌어진 건 당연한 일. 이 대표는 사무실에 있는 전통주 15종을 모두 꺼냈다. 한국인 조수아씨도 생전 처음 본 술들이다.
     
    “한국에는 소주·맥주·폭탄주 세 가지 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맛·향·도수·재료가 다양한 술이 있다니 깜짝 놀랐죠(웃음). 나처럼 전통주를 잘 몰라도 ‘저 병에 담긴 술은 무슨 맛일까?’ 호기심 생기는 레이블을 만들어야지 욕심이 생기더군요.”(앨런드)
     
    “선비들이 자연과 교감하며 마신 술이라는 걸 두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술병을 들고 한강 둔치에 나가 마시기도 하고, 수묵화를 보여주며 먹이 천천히 번지는 모습과 선비들의 옷차림을 설명하기도 했죠. 디자인은 스토리와 필링(느낌)이 중요하니까요.”(조수아)
     
    네 사람은 밀라가 핀란드로 휴가를 다녀온 3주 후부터 의기투합해 또 다른 전통주 레이블 디자인에 도전할 예정이다.
     
    “술과 음료는 병 모양과 레이블 디자인이 아주 중요해요. 코카콜라는 병 모양과 레이블만 봐도 그 맛을 떠올릴 수 있거든요. 한국의 전통주는 개성도 다양하고 스토리도 풍부해서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자극하죠. 디자인할 맛이 난달까.”(앨런드)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