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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룩 냄새에 코 쥐던 하동 정씨 16대 손부, '국가대표 술'을 빚다
    500여년 솔송주 명맥 잇는 박흥선 명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주 
    2008년 람사르총회 건배주 
    '대한민국 주류대상' 대상 수상 
    문재인 대통령 '신선의 술' 극찬 

    술 찾는 이 늘어 대량생산 도전 
    국내외 박람회 돌며 판로 개척 
    도가 '명가원' 매출 30억대로

     

    경남 함양의 개평마을.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 60여 가구 한옥이 예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마을엔 솔송주를 빚는 명가원이 있다. 솔송주는 소나무 순인 송순과 솔잎을 넣어 만드는 ‘사대부의 술’로 불리는 전통주다. 하동 정씨 가문에서 500여 년을 이어온 솔송주를 16대 손부(손자며느리) 박흥선 명인(사진)이 빚는다.

    박 명인은 40년 전 하동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뒤 시어머니로부터 술 빚는 법을 배웠다. 주변의 권유에 조금씩 빚던 술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도가 명가원을 세우고 현대식 제조장을 마련한 지 22년, 명가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 회사로 자리잡았다. 개평한옥마을의 솔송주문화관을 지난달 찾아 박 명인의 술 이야기를 들었다.

    솔송주문화관엔 따뜻한 음악이 흘렀다. 술을 담그는 도구와 재료들이 전시돼 있다. 500년 넘게 이어졌다는 솔송주의 역사, 송순을 채취하는 과정, 술 제조법, 차게 보관해 마셔야 더 맛있다는 팁도 소개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녀간 흔적도 보였다. 문 대통령은 방명록에 ‘솔송주, 신선의 술입니다!’라고 적었다. 대통령 당선 전인 2016년, 선물 받은 이곳 술이 맛있어서 김정숙 여사와 함께 불쑥 들렀다고 했다. 

     

    명가원은 여러 종류의 술을 빚는다. 대표 술은 역시 솔송주다. 잔에 따르면 은은한 솔향이 코끝을 파고든다. 도수(13도)가 아주 낮지는 않지만 달짝지근한 맛에 목 넘김이 부드럽다. 이 약주를 증류해 숙성하면 혀끝이 짜릿한 증류식 소주 담솔(40도)이 된다. 대한민국 식품명인 27호이자 경남 무형문화재 35호인 박 명인이 개평마을에서 40년째 빚고 있는 술이다. 

    개평마을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 고을이었다. 이 마을 대학자인 정여창 선생의 집엔 명망 높은 선비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는데 그때 내놓은 정씨 가문의 가양주가 솔송주다. 

     

    박 명인은 정씨 가문으로 막 시집왔던 때를 회상했다. 당시 솔송주는 이미 근방에서 유명했다. 시어머니의 술 빚는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이 났다. 술을 맛보기 위해 찾는 손님이 많았다. 누룩 냄새조차 잘 맡지 못하던 박 명인도 자연스럽게 술 빚는 걸 배웠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가양주들이 많이 사라졌잖아요. 시어머니께서도 술 항아리와 나무 단지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으셨다고 해요. 그렇게 내려온 전통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내 술에 코를 박고 40년을 빚어왔죠.”

    솔송주는 2007년 열린 남북 정상회담 공식 만찬주였고 2008년 람사르총회 때는 건배주로 쓰이면서 명성을 얻었다. 지난해 11월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환영 만찬 건배주로도 선정됐다.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연이어 대상을 받기도 했다. 역사와 품질을 여러 곳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박 명인이 가양주를 상품화하기로 한 건 이 술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박 명인과 그의 남편인 정천상 명가원 대표는 1996년 주조 허가를 받고 솔송주 제조장을 세웠다. 하지만 술 제조법을 현대식 제조장에 맞게 표준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 명인은 “그 전엔 혀끝과 손끝, 직감으로 해왔다면 대량 생산엔 정확한 제조법이 필요했다”며 “시행착오가 상당했다”고 했다. 다 만든 술 몇십 독을 버려야만 했다. 

     

    판로도 문제였다. 청주인 솔송주는 거의 명절에만 팔렸다. 명가원은 수년간 적자가 이어졌다. 그때 생각해낸 게 과실주다. 청주와 달리 과실주는 연중 인기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복분자술, 복분자와인, 머루주와인을 개발했다. 이 과실주가 명가원을 살려냈다. “2000년대 초반 과실주의 인기가 치솟을 때 우리 복분자술도 대박이 났어요. 홍콩 싱가포르 호주에 수출하고, 군납도 했습니다.” 명가원 연매출은 한때 30억원을 넘었다.
    지금 박 명인은 다시 청주와 증류주에 힘을 쏟고 있다. 명가원의 시작이었던 솔송주와 담솔이다. “명가원을 세운 지 20년이 넘었는데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을 되돌아봤습니다. 우리 집에서 먹던 것을 다시 제대로 알려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전통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달라진 소비자의 입맛도 신경써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 명인의 큰딸 정가영 이사가 명가원에 합류해 훈련을 받고 있다. “전통은 지키되 약간의 변화를 주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지금 20대가 전통주를 잘 즐기지 않잖아요. 하지만 전통주 업체도 젊은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알아야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주라고 해서 꼭 올드할 필요는 없어요.” 정 이사의 설명이다.
     
    함양=FARM 고은이 기자